"아뜰리에 에르메스"
제15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전시
장민승, 여다함, 슬기와 민
2014년 12월 19일 – 2015년 2월 15일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12월 19일부터 2015년 2월 15일까지 <2014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 슬기와 민, 여다함, 장민승 전시>를 진행한다.
장민승
전원 구조될 것이라 생각하며 보았던 4월 16일의 뉴스 속보가 사실은 한낮에 무수한 생명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실황이 생중계되는 장면이었음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세대에게 남은 이 강력한 정신적 외상은 일상적인 감정의 완급조절을 불가능하도록 하고, 변화의 파도에 맞닥뜨리도록 한다.
<검은 나무여>는 상실의 외상이 아물기를 희망하고, 망각하지 않고 뚜렷이 기억하며, 슬픔을 공감하고 애도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이 작업은 여러 편의 하이쿠로부터 발취한 텍스트를 그 근간으로 삼았다. 하이쿠는 5, 7, 5의 3구(句) 17자(字)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로, 한정된 소수의 단어로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암시하는 문학 유형이다. 이 짧은 시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고전 특유의 힘을 지닌 차가운 애도의 조사(弔辭)로 읽히는 한편, 소리내어 읽으면 철저한 형식미에 의해 그 자체로도 음악적인 기운을 준다.
최소한의 단어 구성으로 작가의 감정은 절제되고 읽는 사람의 감정이 여백으로 스며들어 매번 다른 경험과 더불어 마음 속에 다채로운 풍경을 펼칠 수 있는 지점이 장민승의 작업에 차용된다. 하지만 본 작업에서 텍스트는 형상화된 문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는(voiceless/deaf) 언어인 수화(手話)로 재현되는 과정을 거쳐 언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퍼포먼스로 전환되고, 소리(voice/blind)인 음악과 유기적으로 분리, 연결, 반복된다. <검은 나무여>는 서곡과 여섯 개의 하이쿠 발취문을 기반으로 제작된 퍼포먼스, 그리고 팽목항에서 녹음된 사운드와 표제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약 25분의 싱글 채널 흑백영상과 멀티 채널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버린 숯이여, 예전엔 흰 눈 쌓인 나무였겠지’에서 ‘숯’을 수화로 표현할 수 없어 ‘검은 나무’로 의역한 것을 다시 작업의 제목으로 불러왔다.
타버린 숯이여, 예전엔 흰 눈 쌓인 나뭇가지였겠지 白炭や燒かぬ昔の雪の枝
-진노 타다토모(神野忠知, 1624~1676)
<둘이서 보았던 눈>은 2013년에 촬영한 바다 풍경과 세월호 사고 201일째 되는 날 팽목항에서 녹음한 멀티트랙 사운드로 구성된다.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간직한 아름다운 추억의 풍경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까? 분명 숭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우리는 그날 이후 분열적으로 지옥의 흔적을 보아 왔고, 그곳은 우리와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아름다움이나 평온함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바다는 이전과는 다른 사회적 풍경으로 변한 듯하다.
여다함
이번 작업은 여다함이 각각 다른 계기로 수집한 사물들을 한데 엮어 재구성한 실험작이다. 이 사물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가 거래되고 있는 장소와 그 속도를 따라다니면서 얻게 된 수확물이자 우리 모두가 소모하거나 소비하고 있는 사물 혹은 상징들이다. 여다함은 두 종류의 대비되는 사물들을 수집한다. 한쪽으로는 공산품들의 플라스틱 포장재를 수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도처의 조각상들의 이미지를 스크랩했다. 두 종류의 수집품은 모두 어딘가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생활 공간에 섞여 들어와있다.
플라스틱(정확하게는 PET) 소재의 포장재는 진열대 위에서 내용물의 실루엣을 입체적으로 반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품의 부산물로 존재한다. 일단 소비되고 나면 귀신같은 속도로 뜯겨져 알맹이만 남기고 자신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게 내팽개쳐진 뒤에야 제모습을 되찾는다. 쓰레기 선고를 받고 난 후부터 녹여서 재활용되기 직전까지의 순간만큼은 비로소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실존하는 주체가 된다. <죽은 불>은 의미 없는, 혹은 몰라도 무방한 존재들을 소비의 사이클에서 건져와서 그 형태를 본뜨고 캐스팅한 작업이다. 현대 사회의 왕성한 소비욕 한복판에 있으면서 그곳으로부터 완벽히 탈출한 상태, 분화구 주변에 굳어 형성된 원시적인 땅의 지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무뢰한 정신>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나 리우데자네이루의 <구세주 그리스도상(Christ the Redeemer)>,혹은 불상이나 학교 총장의 동상과 같이 세계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각상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를 연결하여 춤으로 구성한 작업이다. 조각상이 인위적으로 짓고 있는 고유의 포즈를 조각상으로부터 떼어 내어 흐느적거리거나 허우적거리도록 한 이 작업은 조각상을 허물기 위한 시도이다. 한 시대의 정신, 정치와 체제, 종교적 인물과 장면들을 정성껏 기리며 만들어진 조각상들은 당대의 정의(正義)에 가깝다기보다는 사실 당시의 이익을 양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올해 여름에 방문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거리마다 자국 출신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조각상과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Franco)의 조상(彫像)들이 서 있는데, 이들은 식민지 시대에 스페인인들이 세워 놓은 성인(聖人)들의 조각상 계보에 속한다. 이 성인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과 닮지 않았고, 성모 마리아조차도 통치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목 좋은 자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조각상은 다른 가치들을 몰아내고 비로소 그 자리를 차지한 정복의 모뉴먼트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한번 세워진 조각상은 사랑을 강요하는 젖먹이가 된다. <무뢰한 정신>에는 힙합 댄스를 추는 숙련된 댄서와 막춤을 추는 인물이 각각 등장하며, 두 명의 댄서는 춤을 추는 자신들의 움직임으로 조각상을 성의껏 부순다. 불편하게 가해지는 사랑의 요구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무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은 춤을 춘다. 조각상이 사람이 아닌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미소를 띠고 있는 한 그 미소는 행패로 여겨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각상에 새겨진 인물들이 일궈놓은 세상의 가치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고 여기는 우상 숭배자가 되기를 작가는 '무뢰한 정신'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의미 있게 여겨 섬기는 것들과 의미 없어서 내다버린 것들이 갖는 형태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시대가 옳다고 믿는 진리가 그 시대의 오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등대>라는 작업은 360도로 회전하는 조명 기구이다. 공간을 산책하듯 돌면서 세상이 쳐놓은 안전장치의 균열과 돌파구를 직접 찾아다니는 수색대이다.
슬기와 민
슬기와 민은 틈날 때마다 막연하게나마 어떤 그림자, 소통으로 분해되지 않는 찌꺼기를 남기려고 한다. 또는 주변에서 그나마 남은 세상의 신비를 시사하는 듯한 단서를 찾아 부각하기도 한다. 이름이 암시하듯, <테크니컬 드로잉>은 이런저런 기술적 용도로 쓰이는 이미지의 세부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아니 마치 막 지나치며 보는 것처럼” 흐릿하고 거대하게 확대한 프린트 작업이다. 작가는 시리즈에 쓰인 ‘원본’ 드로잉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으면서, 그들이 “훨씬 복잡하고 의미 있는 기성 도표의 극히 작은 일부”라고만 말한다. “<테크니컬 드로잉>은 그 어떤 기록도 아니다. 오히려 가공된 이미지에 가깝다. 그것은 세계에 객관적으로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별 기대를 내비치지 않는다. 덜 낙관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이 작업을 구상하면서, 슬기와 민은 ‘인프라 플랫(infra-flat)’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마르셀 뒤샹의 ‘인프라 신(infra-thin)’이 너무나 미묘해 거의 지각조차 불가능한 차이를 가리킨다면, 인프라 플랫은 세상을 평평하게 압축하는 그 힘이 도를 넘어 오히려 역전된 깊이감을 창출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거창하게 비유하면 중력이 너무 커서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현실 세계를 ‘2D의 3D 버전’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극화한 가짜 깊이일 뿐이다. 오늘날 세계는 딱 셀카봉과 그 주인공 사이 정도로 납작해졌다. 인프라 플랫은 그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대상을 투과하며 마이너스 깊이를 창출하는 셀카봉의 시각과 관계있다.” 그렇다고 <테크니컬 드로잉>이 그런 추상적 셀카봉에서 포착한 세계를 그려보는 상상화는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각의 존재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속성을 막연히 암시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슬기와 민은 묻는다. “무차원 세계의 원근법 회화를 상상할 수 있나? 우리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근사하지 않을까?”
15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장민승
사진 남기용 © 에르메스 재단 제공